인사말
설립자

미술관은 내용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집을 지었어도 미술관에 담겨진 내용이 빈약하여 관람자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할 때, 미술관은 아무 것도 아니다.

미술관을 돌아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크고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있어야 한다. 세계 방방곡곡의 미술관을 답사하고 온 사람의 말이 “세계에 미술관은 많으나 좋은 미술관은 극소수다”라고 한다.

그 말은 금세기에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미술관들이 내용을 만들어서 명실공히 아름다운 미술관이 되려면 앞으로도 요원한 시일이 요구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을 지어 놓았다고 해도 미술관을 돌아보고서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이 없을 때, 그 미술관은 아무 것도 아니다.

환기미술관은 진통의 시기를 합치면 20년이 충분히 걸린 거다.
미술관의 문을 열면서 이제부터 익어가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다양한 프로제(Project)를 구상한다. 무엇을 어떻게 할건가는 역사와 병행할 것이며 민족과 인류의 운명에 따를 것이다.

또 오늘의 미술관은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요구하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 시각적인 것, 음악적인 것 그리고 시가 읊어져야 한다.
최근에 읽은 어느 비평가의 말이 생각난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가리켜, “푸르되 풍경이 아니고 파랗지만 하늘이 아니고 노랗지만 태양이 아닌 빛깔과 마티스의 종이오림이 아닌 포름을 토왈에 유채로 그린 새로운 그림이다”라고 했다.

나도 그런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고 싶고, 만들 것이다.

김향안

관장

환기미술관은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수화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기리고 동시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예술문화 발전에 힘쓰고자 김향안이 1992년 서울, 북악산 자락, 부암동에 설립하였습니다. 김환기의 배우자이자 예술적 동지, 지원자로서 김향안은 작가가 1974년 작고한 직후부터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연구 전시 출판으로 세계무대에 알려왔으며, 물심양면 창작자들을 후원해 ‘예술계의 뮤즈’로 불리고 있습니다.

미술관이 자리 잡은 터는 김환기, 김향안 부부가 한국의 자연과 달항아리와 옛 골동 기물들을 애완하며 여러 해 동안 삶과 예술의 애정 가득한 흔적을 남긴 이웃동네, 성북동과 자연환경이 비슷한 곳으로, 미술관의 건축 설계는 김환기를 부모와 스승으로 따랐던 세계적인 건축가 우규승의 작품입니다. 건물은 민족정서를 일깨우는 한국적 재료, 화강암 등을 이용하였으며 지붕의 돔과 빛깔 다른 화강암의 벽면 구성 등은 한국의 자연을 소재로 한 김환기의 구상시대 작품을 연상시킵니다. 내부의 전시공간은 자유롭게 서로에게 열리고 연결되어 소통하면서도 독립적인 배치로 시대별 주제별로 작업을 나누어 소개하거나 주제별 나눔의 고유한 분위기에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환기미술관은 건축가들의 예찬을 받는 한국현대 건축물의 하나로, 전시관람객 외에도 세계로부터 오는 건축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환기미술관의 중요한 설립목적은 수화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정리, 소개하여 작가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예술세계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와 함께 김환기의 유지를 받들어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 소개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환기는 고국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후학을 양성하였고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어울리기 즐겼으며 젊은 창작자들을 이끌어주려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환기미술관은 김환기 김향안 부부의 ‘젊은이는 세계의 미래이자 예술 에너지의 보고’ 라는 믿음을 살려 김향안이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환기재단의 중요 활동 [환기 상, Prix Whanki, Whanki Prize] 제도를 이어받아 국적과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작업에 임하는 작가들을 선정해 전시를 지원해 줍니다. 이는 환기미술관이 운영하고 있는 전시와 행사, 교육 프로그램들 모두 특별한 유행이나 대중적 효과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환기재단과 환기미술관의 설립목적을 바탕으로 김환기가 평생 예술로써 추구한 도전 정신과 끈기 있는 태도를 본보기로 삼아 일관성 있게 예술로써 변화하는 세계,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목적을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미술관은 내용이다” 라는 설립자 김향안의 말처럼 미술관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그 곳에 담겨진 내용일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환기미술관의 전 직원은 미술관의 생명이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피어나 시대에 맞게 변화하며 모두에게 다가가도록 끊임없는 정진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관장 박미정

설계자

김환기 미술관을 서울에 짓기로 한 것은 1988년 초였다. 수화 선생님은 생전에 가깝게 뵙던 분이어서 그 분의 미술관은 내가 설계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는 한편 책임에 대한 부담을 동시에 느꼈다. 미술관은 수화 선생님의 정서와 예술에 어울리는 곳이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그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산, 달, 구름, 바위, 나무 같은 자연과 어울리고 한국의 정취가 있으며 현대적인 세련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설계를 시작할 당시의 부지는 현 본관 주변과 뒷산을 포함하는 전면도로와의 고저차가 8m이상이 되는 급경사 대지였다. 설계 기간 중에 인접 서측 부지가 확보되어 당초 의도했었으나 수용하기 어려웠던 기획전시와 집회공간을 포함한 별관 및 주차장과 정원이 계획되었다.

부암동 골짜기는 큰 건물이 들어가기에는 스케일이 작다. 그리고 부지는 대지면적이 제한되어 있는 한편 그 형태도 복잡하다. 반면에 미술관은 전시실 및 공용공간에 높은 천정고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반 주거환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용적이 요구된다. 이러한 상반된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선 상당한 프로그램 공간을 지하공간에 배치하도록 계획했고, 건물은 분절시켜서 여러 개의 건물이 모이는 집합형태를 취하는 설계개념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건물은 서로 다른 형태와 기능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전체로서는 집합체로서의 미술관의 의미와 기능을 갖게 된다.
건물들은 담으로 규정된 영역 내에서 중정을 중심으로 모여 있으며 계곡의 흐름에 따라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상부의 본관 건물들은 복사면의 방향에 맞추고 남측 부속 시설은 부지 경계에 맞추어서 축의 변화를 이루고, 진입부문의 별관은 축에 맞추어서 축을 균형적으로 엮도록 하였다. 큰 흐름 속에 작은 변화들은 계속 안의 크고 작은 질서를 반영한다.
건축의 축과 계곡의 방향을 일치시킴으로써 골짜기 내에서의 공간의 흐름을 부각시키는 한편 건물들 사이에 동서 방향을 조성함으로써 그 축을 따라 북한산성과 인왕산 등 원경을 차경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일련의 벽들을 동서로 배치함으로써 좁은 계곡 건너 혼잡한 시계를 차단시켜 준다. 법규상의 조건이기도 하였지만 지상에 노출되는 건물의 높이를 대등하게 하여 전체의 지형이 암시적으로 인식되도록 하였으며 가장 높은 곳에 배치된 상설전시관은 관객 동선의 최상부에 자리함으로써 두 볼트(vault)의 형태를 가진 건축형태와 함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외곽에 위치한 부속 관리동은 각 층이 단을 지어 점차 높아지게 함으로써 주위의 작은 건물들의 스케일에 조화시키는 한편 동쪽으로 높아지는 계속의 지형을 일시적으로 연상토록 하는 의도로 구상되었다.
건물의 재료는 전통 한국건축과 같이 땅에 접하는 부위는 조적의 의미를 가진 석재로 하고 그 위는 판재로 표현된 석재, 그리고 지붕은 납을 입힌 동판으로 처리했다. 별관은 외곽의 단과 함께 고압벽돌을 사용함으로써 본관의 특수성에 대비한 보편성을 표현하였다.

미술관의 내부공간은 중정 및 지하에 위치한 8m입방 공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공간은 전시실의 기능을 겸비한 다목적 공용공간으로서 도시의 중심광장 같이 집합 및 인식의 중심역할을 하며 이 공간 주위의 환상형 계단을 통하여 각종 전시실이 연결된다. 사면의 외벽은 일광이 투사되게 함으로써 폐쇄감을 해소하고 외계와의 연계를 암시해 준다.
각 전시실과 중심공간과의 연결 부위에는 접속공간의 영역을 설치하여 각 공간의 독립된 의미를 강조시키고 동시에 미술관에서 필요한 동선, 수장과 설비시설들을 수용하도록 계획하였다. 동선체계는 일련의 환상(circle)체계로 되어 있고 이들 환상 체계가 간혈적으로 교차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움직이는 동안 동선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전시실 및 대부분의 내부 공간은 흰벽으로 처리했다. 벽과 천정 모두가 동일 재료로 그 조형성은 크기와 형태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전시를 위한 조명은 미술품의 보존 및 조명 조절이 용이한 인공조명으로 하고 드로잉 전시실을 제외한 각 층의 전시실들은 폐쇄감을 해소하기 위해 간접일광을 도입했다.

옥외공간은 대도시 안에 위치한 미술관으로서 충분한 휴식공간을 갖춤으로써 미술관의 경험을 풍부하게 보완할 수 있도록 담에 싸인 대지 안 북측 경사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경, 산책로 및 휴식공간으로 계획하였다. 대문에서 본관까지는 기존의 두 소나무를 중심으로 주 옥외공간을 형성하게 되어 본관 및 별관 진입을 위한 앞마당 기능을 하게 되며, 본관의 중앙에는 중정이 있고 화계가 형성된 후원 및 건물과 담 사이는 계단으로 구성된 산책로가 있다. 이들 옥외공간은 몇 개의 환상조직으로 연속된 공간을 이루는 한편 중간에 실내동선과 접하게 함으로써 전체 동선을 따라 내외를 다양하게 경함할 수 있도록 했다.

환기미술관은 계획 5년 만에 준공되었다. 미술관은 계획기간과 관계없이 오랜 시간 남아 있게 된다. 주거나 상업건물과 달리 시대가 바뀌더라도 소장된 작품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되고 그 작품을 수장하는 미술관 역시 오랜 생명을 갖게 된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 오랜 후에 올 사람들 모두가 미술관의 손님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불가피하게 그리고 당연히 미술관에 표현되게 되는 수화 선생님이 사신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의 역사성을 뛰어넘어 무엇보다 미술관이 자리하는 땅이 갖는 속성과 건물의 질서가 갖는 의미를 표현하는 설계를 통해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도록 의도하였다.

우규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