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서울시대
1933-1955

동경/서울시대

미술의 본격적인 입문을 알리는 일본 유학시기는 김환기가 서구 미술사조의 새로운 경향들을 접하게 되면서 추상미술에 눈뜨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청년 김환기는 1933년 일본대학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여 이듬해인 1934년, 일본 화단 내에서 전위를 표방하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연구생으로 참여합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귀국한 후지타 츠구하루(藤田嗣治), 도고 세이지(東鄉靑兒) 등에 의해 유럽을 풍미했던 입체주의, 구성주의, 미래파 등의 미술사조롤 통해 추상회화에 대한 열의를 키워나가게 되며, ‘이과회’, ‘백일회’, ‘광풍회’, ‘자유미술가협회’ 등의 전위적인 미술단체에서 몇 차례의 입선과 전시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동경시대를 대표하는 <종달새 노래할 때(1935)>는 당시의 복합적인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향의 누이동생을 생각하며 한복을 입은 여인상을 화면 중심에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여인의 몸체나 팔의 경우 구체적인 묘사를 지양하고 머리에 올린 바구니 안은 그대로 투명하게 노출하면서 대담하고 실험성 강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한편 작품의 제목이나 화면의 모티브들은 한국적 서정성이 담겨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 유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환기는 추상미술에 대해 교우들과 단체를 결성하고, 문화예술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루면서 전통미에 대한 개안과 문학적인 소양을 다지게 됩니다. 도서의 표지와 장정, 삽화를 그리거나 수필, 전시 비평글을 발표하고, 골동과 서화 등을 수집하며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깊은 애정과 관심을 키웁니다. 김환기는 특별히 달항아리라 불린 백자대호에 대한 애정과 수집이 각별하였는데, 흙과 유약의 오묘한 조화로 빚어진 조선백자의 부드럽고 미묘한 빛깔과 단순한 형태가 현존하는 미적가치 중 으뜸이라 여기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 칭송하였고 1940년대부터 작품의 소재로 적극 표출하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을 간 김환기는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에도 창작열과 예술혼이 꺾이지 않고 신문,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거나, 피난지 풍경, 판잣집, 피난지 거리 등의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는 등 계속해서 작품을 구상하고 그림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1947년 결성한 동인단체인 ‘신사실파’를 피난시절의 막바지까지 이끌었으며 동시에 현대미술의 미래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구상에 매진하면서 전통기물에 대한 예찬과 자연주의적 내용이 짙은 조형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동경시대에 보여주던 비대상적인 구성은 서울·부산시대의 화풍의 흐름에 따라 점차적으로 산, 달, 구름, 백자항아리, 매화 등 한국의 자연과 조선 문인화를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자연이나 정물소재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특징을 보이게 됩니다. 반추상의 간결한 선들은 조형의 기본을 탐구하던 기하학적인 모습에서 두터운 마티에르 속에 한국의 모습들을 표현하는 선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는 김환기 예술세계의 근저에 흐르는 한국적 풍류의 표현과 우리 민족의 정서와 감흥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의 결과물입니다.

파리/서울시대
1956-1962

파리/서울시대

산과 달 그리고 사슴, 매화, 둥근 백자 항아리는 김환기의 1950년대 작업에서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로 정물과 풍경의 구분 없이 한 화면에 한국의 자연을 표상하는 조형요소로서 구성됩니다.

김환기는 일찍이 한국고미술에 대한 애착과 수집열이 대단하였는데,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애완한 것은 품에 넘치도록 크고 둥근 유백색과 청백색의 달항아리였습니다. 그는 때때로 항아리들을 마당에 내다가 초석 위에 올려놓고 감상하였고, 백자 항아리를 기물 이상의 자연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조선 백자 항아리는 본래 절제와 지조, 규범을 중요시하고 자연 안에 내재되어 있는 미적 가치를 볼 줄 알았던 당대 지성인의 격조와 품위를 가장 잘 반영하는 조형물입니다. 작가는 일찍이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그러한 자연의 반영물인 백자 항아리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을 발휘하여 담백하고 무심한 듯 절제된 아름다움에 대한 시감을 50년대 회화의 중심 모티브로 승화시켰습니다.

김환기가 백자 항아리와 함께 즐겨 그렸던 소재인 산월풍경은 195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그의 예술관과 회화의 양식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작가는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로 산봉우리와 우거진 숲, 둥근 일월, 일렁이는 구름, 흘러가는 강과 바다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작가의 산월풍경은 산수화의 형태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림 안에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담고자 하는 기운생동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색조의 바탕 위에 자연의 원형으로서의 산월을 구현하는데, 여기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푸른 청색은 만물이 생성하는 장으로서 ‘생명의 흔적이 담겨진 청색’으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김환기는 1956년 파리로 건너가 작업을 하면서, 전통에서 영감을 구하는 성향이 더욱 심화되는데, 1957년 1월에 쓴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詩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가 강력한 노래가 있구려. 지금까지 내가 부르던 노래가 무엇이었다는 것을 나는 여기 와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소.”

이 글에서 작가의 전통적 조형미와 색질감에 대한 애정이 더욱 각별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환기는 50년대에 그만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담백한 청색 주조 화면, 평면적인 면의 구성과 장식성 그리고 촉각적인 감각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질감 등의 특징을 보여주는 다양한 화법으로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로 구성된 서정적이고 시흥이 넘치는 조형세계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자연의 외형에서 출발하였지만 보편적 개념의 형태로 단색조의 무한 공간 속에 작가가 꿈구는 이상향의 단면을 구현한 것입니다.

3년간의 체류기간동안 니스와 브뤼셀을 포함하여 5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파리에서의 소재나 색채 실험은 후기에 해당하는 뉴욕시기에 새롭게 발전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뉴욕시대
1963-1974

뉴욕시대

김환기는 미국으로 건너간 1963년부터 작고한 1974년에 이르는 뉴욕시대를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산, 달, 강, 새, 나무 등이 있는 자연 풍경을 순수한 점, 선, 면의 조형적 요소로써 내밀한 서정의 세계로 심화시켰습니다.

1968년 1월 23일 작가의 일기에 “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점 모티브는 뉴욕시대에 행해진 과슈와 콜라주 그리고 파피에 마쉐, 오브제, 종이에 유채, 드로잉 등과 같이 재료와 양식의 범주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다양한 조형실험을 거쳐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면 전체를 덮는 전면점화로 발전됩니다.

김광섭의 시 한 구절에서 제목을 붙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로 잘 알려진 전면점화 시리즈는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기좌도의 그 넓고 아득한 바다와 하늘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아교 칠한 발 고운 생면에 테레핀을 풀어 묽게 만든 유채물감으로 선을 긋고 담채를 연상시키는 점을 찍음으로써 무한히 확장되어 가는 우주적 공간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작가는 고착되지 않고 안으로 스며드는 점을 반복해서 찍음으로써 점이 선이 되고, 그것이 모여 하나의 면이 되는 서로가 개별적인 요소로서보다는 융합된 하나의 조화로 완성합니다. 또한 점은 화면에서 번지고 얼룩지면서 하나하나가 개성을 지니면서 풍부하고도 다양한 짜임과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일정한 계획을 통해 만들어지는 구성이 아니라 예기치 않는 잠재성을 드러내면서 태어나는 유기체이며, 이러한 특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화면이 숨을 쉬는 듯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셀루리안 블루, 울트라마린, 프러시안 블루, 로즈 레드, 로즈 매더 등의 깊고 신비한 색감을 사용하여 그려낸 그 우주적 공간, 미세한 색점의 음영은 예전처럼 산과 달, 하늘과 같은 구체적인 형상은 없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 작가가 느끼는 오만가지 희노애락을 색점 하나하나에 담음으로써 오히려 무한세계로 열려진 시적 조형언어를 창출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심코 찍어가는 점이 아니라 점 하나에 그가 만난 인연과 자연, 음악 등 작가가 살아온 시간을 새긴 것입니다. 친구의 편지를 읽고, 그는 편지 구절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고 했다. 뻐꾸기의 노래를 생각하며 종을 푸른 점을 찍었다. 앞바다 돗섬에 보리가 누르렀다고 한다. 생각나는 것이 많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김환기의 색점은 바로 자연과의 은밀한 대화이자, 자연과의 근원적인 교감이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작가는 뉴욕으로 건너간 후 민족적 색채에서 나아가 보다 보편적이고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회화를 추구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예술관의 변화에 따라 자연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갖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애착과 감동을 화폭에 표현하는 그에게 거대한 기계문명으로 대표되는 뉴욕의 환경은 소재의 변화를 겪어야 하는 하나의 도전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감각적으로 포착해야 하는 외부의 존재가 아닌, 작가와 함께 살아 숨 쉬는 그 자체의 생성의 원리에 가까운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관조적 시선을 통해 차가운 도시에서도 자연과 무한한 우주적 공간에 대한 가장 순수한 시정을 토로하는 온기를 지닌 회화를 추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