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nki
심상의 풍경: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
Landscapes of the Mind: Always Think. of What You Do Not Know…
본관에서 진행되는 환기미술관 특별기획전 《Whanki_심상의 풍경: 늘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이하 심상의 풍경)》은 김환기(1913-1974)의 뉴욕시대(1963-1974)를 중심으로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담은 전시이다.
김환기가 마지막까지 예술혼을 불사른 뉴욕, 그곳에서 그가 추구한 자연의 본질은 가장 처음이자 가장 완전한 추상으로 향했다. 김환기가 뉴욕에서 겪은 계절의 변화, 자연의 무한함,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온기와 촉감, 그러나 점점 노쇠해가는 몸, 고국에 대한 그리움 등 이역만리 그의 마음속 켜켜이 쌓인 풍경은 김환기의 예술에 녹아 들어갔다. 그가 뉴욕에서 일기로 정리해 두었던 수많은 생각은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무궁무진한 창작의 시도가 되었고, 더할 나위 없는 궁극에 이르고자 한 ‘심상의 풍경’이 되었다.
이번 전시 《심상의 풍경》에서는 김환기의 추상작품과 작품을 그릴 당시 작가의 생각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인 김환기의 어문語文을 적극 활용하고 작품과 함께 전시의 맥脈으로 삼고자 하는 기획 의도가 담겨 있다. 특히 김환기의 문학적 시정詩情과 함께 예술가적 기질이 담겨 있는 ‘편지그림’과 치열한 창작활동을 펼치며 쉼 없이 정진해온 예술 여정의 길고 깊은 발자취가 담긴 ‘뉴욕 일기와 에세이’ 등을 통해 제시된다. 예술가의 작품에는 예술가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스며있다. ‘늘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 생각하라(1969)’는 김환기의 말처럼 삶에서 직면하게 된 알 듯 모를듯한 생각의 파편들이 가장 순수한 조형 요소인 ‘점, 선, 면, 색’으로 정제되어 추상화면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한층 더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다.
김환기, 뉴욕시대
김환기는 혼돈의 시대를 살았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했고,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기쁨을 맞이했다. 그러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던 급변하는 나라에서 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환기는 꿈이 있었다.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예술가가 되고자 했고, 한국의 예술가로서 세계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어느 날 밤, 김환기는 석유불 아래에서 파리에 있는 김중업(1922-1988) 건축가에게 편지를 쓴다. “코리아는 예술의 노다지올시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이제 전 세계의 예술은 그 주제가 우리 코리아에 있다는 말이오.(1953)” 전쟁 속에 살면서도 악착같이 그림을 그리며 예술과 싸우던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에서 한국의 역사와 예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또한 본인의 예술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고 파리로 향하는 마음을 편지로 담았다. 그렇게 김환기는 꿈에나 가볼 수 있었던 파리에 가게 되었고, 또다시 그의 마음은 예술의 용광로와도 같았던 뉴욕으로 향했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이자 책임자로 참가하게 되면서 김환기는 브라질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역동적인 현대미술의 흐름에 자극을 받고 더 큰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인하고자 결심한 김환기는 그길로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미 지천명에 접어든 김환기는 한국에서의 명예와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현대예술의 중심지이자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뉴욕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다. 김환기가 마주한 뉴욕의 마천루는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화려한 도시는 김환기에게 그저 무미건조한 고층 건물의 도시일 뿐이었다. 문득 현대 세상이 재미없게 느껴진 김환기는 ‘강을 내려다보며 살았던 서교동 집, 반半섬과 나루터의 추어탕, 호주머니에 푼돈이 잡히면 엿을 사서 집으로 향했던’ 한국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맥주를 마시며 그림도 바라보고 창밖도 내다보고 하는 동안에 아주 캄캄해졌어요.
지금 서울은 새벽인가. 리버사이드 하이웨이를 내다보니 가고 오고
4열로 꼭 무슨 기하학적 경주처럼 5미터 정도 간격으로 자동차가 연줄 달리고 있어요.
현대라는 세상은 정말 살 재미가 없어요. 우리 어떻게 하면 재미나게 살 수 있지?
작년 이맘때 우리 강을 내려다보구 살았나. 반半섬, 그리고 나루터에 추어탕이 있었지.
신석동 내려서 걸어서도 들어오고 버스도 타고 들어오고,
호주머니에 푼전이 잡히면 엿도 사가지고 들어갔어요.
B나 M씨가 우리나라를 좋아하고 거기 오래 머문 이유를 알겠어.
김환기, 1963년 11월 21일
김환기는 뉴욕에 도착한 이후, 한국에서부터 인연이 있던 B의 작업실 한편에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서울에서 작업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그리기도 했고, 공원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우연히 만난 레이몬드라는 작가는 김환기의 스케치북을 보고 조그만 작품이 우주감感을 주고 아주 묘한 색깔이라며 경이적인 태도를 보였다. 누군가 알아봐 준다는 생각에 힘이 난 김환기는 용기를 내어 작품에 정열을 쏟았다.
어제는 어쩐지 뒤숭숭해서 거리에 나갔지.
우연히 레이몬드Raymond라는 화가를 만났어.
내 스케치북을 보였더니 경이적인 태도였어. 너무 동양적인가? 물었더니 그렇지 않대.
대단히 오리저널하대. 쬐끄만 작품이 우주감을 준대. 묘한 색깔이래.
가다가 진지하게 내 그림을 보아 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기쁘고 용기가 나요.
나 우선은 다작보다도 알뜰한 그림을 만들래. 금년은 4, 5폭에다 정열을 쏟을래.
김환기, 1963년 12월 11일
1964년, 한국에 남겨졌던 김향안이 뉴욕에 도착하고, 김환기가 ‘아시아와 미국의 문화 교류 프로그램’ 작가로 선정되어 록펠러 3세 재단의 지원을 받아 ‘셔먼 스퀘어 스튜디오Sherman Square Studio, New York’에 입주하게 된다. 또 제17회 개인전을 아시아 하우스 화랑에서 열고,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 3점을 비롯한 서울에서 가져온 1959-63년 작품들인 ‘산, 산월, 산협을 나는 새’ 등과 신작 ‘야상곡, 새벽별’ 그리고 과슈화수용성 불투명한 물감인 과슈로 그린 작품를 포함한 30여 점을 출품했다. 당시 뉴욕 관계자들은 ‘중첩된 유화 작품에서 오는 미묘한 빛깔과 신비한 분위기’를 절찬했으며, ‘과슈가 주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세계’를 격찬했다. 다음 해인 1965년에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특별실)’에 초대되어 ‘제18회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간다.
그러나 김환기에게 마냥 친절하기만 한 뉴욕은 아니었다. 1966년 어느 날, 김환기는 추상화가 ‘아돌프 고틀리브 Adolph Gottlieb’를 비롯해 미술계 인사들을 초청해 교류하는 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타스카 화랑을 소개받고 ‘봄의 소리, 메아리, 밤의 소리, 세레니티’ 등 유화 30점을 타스카 화랑을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타스카 화랑은 김환기의 작품들을 비밀리에 팔고는, 작품값을 2년여 동안 지불하지 않다가 어느 날 화랑에 불을 지르고 사라졌다. 이 무렵 작품을 할 재료는커녕 생활비도 없어서 김향안은 직장에 나가기 시작하는 등 험난했던 뉴욕의 이면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뉴욕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 예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반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불확실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함이 공존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반된 감정은 김환기에게 새로운 예술에 대한 창작 의지를 부추기는 자극제가 되었다.
창조의 일은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다.
새로운 것이라 생각하고 해놓고 보면, 누군가가 이미 한 일일 때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 지금까지 없었던 일을 찾아내고자 하는 데서
오늘의 예술의 다양성이 이루어지고,
또 따라서 이해 부득의 불가사의한 일들이 속출하는 오늘의 창조계 현상인 듯싶다.
불가사의한 일들이 진실로 좋은 일,
다시 말하면 그 일에 예술성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인정을 받을 수 있되
불가사의하고 기괴한 일로써 끝나 버릴 때는 하나의 조류에 불과하게 된다.
김환기, 1966
뉴욕이란 세계무대로 한 걸음 나아간 김환기는 본격적으로 과감한 화면 구성과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기법실험들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작가 고유의 예술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자연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서정적 반추상의 화면은 점차 ‘점, 선, 면, 색’의 순수 조형 요소로 구성된 화면 실험과 ‘신문지, 포장지, 한지, 캔버스’ 등의 다양한 바탕 위에 ‘나이프나 동서양의 모필’ 또는 ‘종이죽, 모래, 먹, 유화, 과슈, 마커, 볼펜’ 등의 재료로 ‘십자구도, 사방구도, 상징도형, 석탑구성’ 등의 수많은 추상화면을 만들어 냈다.
‘미술이란 밀림에 투족投足한 이대로 죽어도 좋다며, 꿈을 이루고 귀국하겠다(1965)’던 김환기는 1960년대 누구보다도 충만한 예술세계를 펼쳤다. 어느덧 뉴욕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계획했던 1970년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한국일보에서 주최하는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이때 김환기는 이산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마음속으로 노래하고 시화 대작을 만드는 구상을 한다. 화면 가득 푸른 점을 찍어 완성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로 대상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더할 나위 없이 궁극에 이른 ‘점화點畵’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후 뉴욕의 화단에서도 ‘대단히 수준이 높은 서정 추상의 세계로 우아한 빛깔을 지닌 작품이며 아름다운 우주감을 느끼게 하는, 창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업’이라 찬사를 보낸다. 이후 김환기는 뉴욕에 머물며 ‘점화點畵’에 세계에 몰입하던, 향년 61세의 나이로 평소에 즐겨 다니던 뉴욕주 발할라Valhalla 산마루의 켄시코Kensico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0년대 김환기가 펼쳐냈던 다채로운 추상화면은 점차 간결해지며 더욱 근원으로 다가간 결정체結晶體, ‘점點’으로 함축된 조형 언어로 완성되었다. 유화물감이 층층이 쌓여 올라갔던 김환기 특유의 색 질감은 맑게 희석된 유화물감을 사용하면서 화면에 흡수되고 중첩되어 서정의 세계를 심화시켰다. 이역만리에서 그리운 고국을 떠올리며, 마음속에서 부유하던 수만 가지 생각, 만유萬有의 점을 찍어나간 조형시詩의 세계, ‘점화點畵’는 더할 나위 없이 궁극에 이른 ‘심상의 풍경’이 되었다.
내 작품은 공간의 세계란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 가는 점.
어쩌면 내 맘속을 잘 말해 주는 것일까. 그렇다. 내 점의 세계….
나는 새로운 창을 하나 열어 주었는데 거기 새로운 세계는 안 보이는가 보다. 오호라….
김환기, 1970년 1월 8일